안식일학교
2014.11.27 18:25

9과 안교 교과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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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N 해설 안교 교과 자료


201449과 율법의 시여자이신 재판장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Intro

 

우리나라는 삼권분립 원리에 따라 나라가 운영된다. 여기서 말하는 삼권이라는 것은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뜻하는데, 입법권은 국회가, 행정권은 정부가, 그리고 사법권은 법원이 맡도록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국가의 권력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옛날 왕정시대에는 이 모든 힘이 다 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행정도 자기 맘대로 하고, 법도 자기 맘대로 만들고, 또 재판도 자기 기분에 따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삼권이 분리되어 서로를 견제하고 권력의 균형을 이룰 때 보다 합리적으로 나라의 일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이와는 다르다. 그분은 입법자이시면서 동시에 재판관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품성을 따라 법을 만드시며, 동시에 그 법에 따라 재판하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법은 그분의 사랑의 품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은 그 법 정신에 맞게 우리를 재판하신다는 것이다. 오늘은 하나님의 품성이 담긴 율법과 그 율법을 대하는 우리에 태도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오늘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율법의 시여자요, 재판관으로 모시는 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자.

 

네 오늘은 야고보서 연구 제 9번째 시간... 율법의 시여자되시고, 우리의 재판장 되시는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우리들의 삶은 어떠해야하는지 김성진 목사님 모시고 공부해보도록 하겟습니다.

 

일요일 : 판단 또는 분별력

 

율법은 그 법을 만든 분이 어떠한 분인지를 말해준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다. 이 왕이 법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은 가게를 단 하나만 낼 수 있다는 법이었다. 한 사람이 두 개의 가게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 그 나라에서 가게를 두 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왕 자신이다. 이러한 법을 만들어 놓고는 그 법의 이름을 붙였다. 뭐라고 붙였을까? “왕만 두 가게!”

 

좀 썰렁하긴 하지만, 율법 이야기 나오니까 벌써부터 조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 말씀드렸다. 어쨌든 법은 그 법을 만드는 사람이 어떤 품성을 가진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폭군이 법을 만들면 말 그대로 난폭한 법을 만들게 된다. 마음이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 법을 만들면 그 사람을 닮은 법이 나온다. 이처럼 하나님의 율법도 그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즉 그분의 품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비방하지 말라

그런데 문제는 그 법에 담긴 법 정신을 사람들이 오해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품성과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이 모두 나타나 있다. 마치 성소가 죄 없는 삶을 요구하는 십계명과 죄인을 용서하기 위한 번제단을 중심으로 지어진 것처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품성은 죄에 대한 미움과 죄인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정신을 오해해서 죄는 사랑하면서 동시에 죄인은 미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율법이라는 이름하에 말이다. 그것이 바로 남을 비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남을 비방한다. 안식일에 교회 안 왔다고 비방하고, 헌금 적게 드린다고 비방하고, 교회 올 때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온다고 비방한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율법에 담겨진 법 정신, 사랑이다! 비방이라는 것은 사랑 없는 비난을 뜻한다. 법 정신 없는 율법이 곧 비방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야고보는 바로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여기서 야고보는 형제들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왜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율법을 비방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율법이라는 명목 하에 형제를 향해 사랑 없는 비방을 쏟아내는 것은 사랑이라는 법정신에 맞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곧 율법 자체를 모독하고 비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은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곧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의 사실은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때는 그 율법을 지키는 준행자가 되라고 주셨지 재판관이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율법으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이요,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이려는 교만의 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결코 서로를 비방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바로잡아주라

그렇다면 잘못된 길을 가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서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사랑 없는 비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정죄를 위한 정죄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제를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이 말씀을 잘 보라. 누군가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는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말한다. 이게 우리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비방하는 것과 바로잡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비방은 그 속에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비방은 넘어져 있는 사람을 완전히 엎드려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행위이다. 이것은 사단의 모습이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므로 죄를 쉽게 짓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 후에 사단은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너무도 무겁게 느끼도록 만듦으로써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를 내려 누른다. 이것이 바로 비방의 정신이다.

 

반면에 바로잡는 일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잘못해도 눈감아주고,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죄를 분명하게 죄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분은 죄인으로부터 죄를 때어내어 다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6:1에서 말하는 바로잡는 일이다.

 

이 두 모습이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사건이 바로 요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그 여인은 누가 봐도 죄인이었다. 현장에서 잡혔으니 변명도 할 수 없다. 이 여인을 두고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율법을 철저히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정신은 버리고 율법의 껍데기만 가지고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말한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행동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만 봐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므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할 때에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통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균형지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날,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말씀은 너희는 율법의 재판관이 아니요, 율법의 준행자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아마도 야고보는 이 사건에 나타난 교훈을 기억하고 약 4장에서 그와 같은 교훈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용

우리는 이 교훈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죄를 죄라고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비방이 된다. 반면에 똑같이 죄를 죄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향한 간절한 사랑이 있을 때에는 그 말이 오히려 죄인에게 복음이 된다. 왜냐하면 그 기별은 죄인으로 하여금 죄로부터 돌아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의 정신은 버리고 율법의 껍데기만 가지고 살 때가 참 많다. 율법에 따라 판단하고, 율법에 따라 정죄하고, 율법에 따라 사람을 죄인 만들 때가 참 많다. 그러나 기억하라. 사랑이 빠진 율법은 오히려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재판관이 아니라 율법의 준행자임을 기억하고, 항상 율법의 정신에 따라 온유한 마음으로 남을 바로 잡으며, 자신을 살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월요일 : 율법의 시여자가 재판장임 - 오늘 교과의 주제와 같은 제목이네요

 

 

오늘날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원주의 한 가정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는 집주인이 잠을 자고 있는 틈을 타 거실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는데, 이 때 그 집 아들인 A씨가 입대를 앞둔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새벽 3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는데, 2층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서랍장을 뒤지던 도둑 B씨를 발견했다. 가족들이 걱정된 A씨는 격투 끝에 50대 도둑 B씨를 붙잡았고 직접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A씨에게 맞은 도둑은 뇌를 다쳐 뇌사 상태가 되었고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흉기 없이 도주하려던 도둑을 과하게 폭행했다며 20A씨를 기소했다. 이에 대해 A씨는 놀란 상황에서 도둑을 제압하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놓고 재판이 벌어지게 되었고 법원은 1심에서 A씨에게 16개월을 선고했다.

 

이 판결을 두고 논란이 참 많다.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했는데, 76.2%는 무죄다라고 답했고, 10.9%만이 유죄라고 답했다. 나머지 12.9%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Stand your ground”라는 법이 있다. 이것은 자기 땅을 지키라라는 의미로서 집주인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경우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도망할 필요 없이 총기로 대항할 수 있도록 한다는 법이다. 현재 이 법을 26개의 주에서 채택해서 시행하고 있는데, 그들의 기준에서 봤을 때 이 사건은 당연히 무죄다.

 

그러나 이것을 이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칼을 들고 돈을 빼앗으려는 강도범을 막다가 죽이게 된 경우는 사회통념상 허용될 수 있지만 돈을 훔치려는 절도범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그렇게까지 자기 방어를 허용하면 또 다른 사회 혼란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를 예로 들면, 1964219일자 신문 기사를 보면, 춘궁기에 배가 고파 미군 부대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려는 16세 소년에게 미군이 총을 쏘아 죽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도둑을 총으로 잡는가? 너무나 비인도적인 처사이다라는 경찰서장의 술회가 나온다. 피해자 입장이 되어 깊이 생각해보면 절도범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렇더라도 그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민의 상식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오늘날 법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법의 특성을 비판하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까지 한다. 이것은 그만큼 법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일이 어렵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법은 어떨까?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여 누구나 쉽게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제 생각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법이 세상의 법보다 더 어렵다. 왜냐면 세상의 법은 주로 행위에 무게를 두고 진행된다. 물론 어느 정도 그 행위의 배경이 참작되기는 하지만, 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행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까지도 다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재판자 역할을 맡기지 않으신 것이다.

 

야고보는 4:12에서 이렇게 말한다.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그는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라고 말한다. 법을 만드신 분이 재판도 한다는 말이다.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법을 만든 사람이다. 또한 어떤 정신과 목적으로 그 법을 만들었는지를 잘 아는 사람만이 또한 가장 훌륭한 재판장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입법자와 재판관이 오직 한 분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판단이 얼마나 공의로운지를 말해준다.

 

또한 그분은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신다는 말은 자기 맘대로 이 사람은 구원하고 저 사람은 멸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마치 다윗이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며 죽이려는 사울의 심판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너는 누구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말한 것이다.

 

적용

살다보면 누군가를 판단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판단하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을 구원하시고 멸하시는 모든 결정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설프게 이해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결코 율법의 법 정신에 합당한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은 곧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일이다. 남이 죄인이고 아니고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죄고 죄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난 후 겸손한 마음으로 내 이웃과 또 자기 자신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모든 판단은 율법의 시여자이시며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화요일 : 앞일을 계획함

 

살면서 앞 일을 계획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아무 계획도 없이 사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잠 16:9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인도해 주시니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계획을 이루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같은 잠언 16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여기 경영이라는 단어는 계획 또는 생각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의 모든 일을 여호와께 맡기면 네가 계획한 것이 이루어지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앞일에 대한 계획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세운 계획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결코 무계획적인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계획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문제는 계획을 세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뜻대로 계획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4:13-14)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말을 어떻게 들으면 아무 계획도 없이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내가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년 동안 장사해야겠다라는 계획조차도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획은 단순히 앞날의 삶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 이익에만 집착하여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사는 자들의 삶을 나타낸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예수님의 비유에도 나온다. 바로 눅 1216절부터 있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는 한 부자가 나온다. 그는 올 해 풍년이 들어 생각보다 많은 소출을 얻었고, 그것을 다 쌓아둘 곳이 없어서 이전에 있던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지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충분한 식량이 있으니 앞으로 얼마간은 큰 걱정 없이 평안히 살 수 있겠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 여기까지만 보면 이 부자의 태도와 생각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소출이 많아서 더 이상 쌓을 곳이 없으면 창고를 더 크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많은 곡식들이 쌓여 있으면 몇 년간 별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을까? 지극히 상식적인 삶의 태도를 왜 하나님은 어리석다고 하셨을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건 하나님께서 그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신 것은 삶에 대한 그의 계획때문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그의 태도때문이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이 이렇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형이 자기와 유업을 나누지 않으니 형한테 말좀 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핵심은 바로 탐심이다. 형과 동생이 유업을 공평히 나누어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탐심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것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가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셨다.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나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단순히 자신의 재물을 쌓아 둔 것이 잘못이 아니었다. 그들의 잘못은 바로 탐심이었다. 이러한 탐심은 이 땅에서는 그들을 부요하게 해 줄지는 몰라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지극히 가난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들. 이 땅 너머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나 잠언 169절의 말씀이나, 413절의 말씀은 모두 앞일을 계획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획에 하나님이 빠져 있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노력하며 살되, 그 계획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현명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수요일 : 안개

 

성경에 보면 안개로 비유된 것이 여러 가지가 나온다.

 

(21: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여기서는 불의한 방법으로 취한 재물을 안개라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 그렇게 모은 돈은 다 사라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준다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으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속이는 말로 모은 재물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이다.

 

(벧후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들은 탐욕으로 인해 불의의 삯을 받고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들을 뜻한다. 마치 발람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리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거짓 교사들도 그러한 탐욕으로 인해 백성들을 미혹하는데, 결국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은 다 안개처럼 사라지겠다는 말이다.

 

이처럼 안개는 주로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부정적인 것으로 성경에 묘사된다. 물론 사 44:22에는 우리의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셨다고 말하므로 안개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 같지만, 안개를 죄로 비유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의 부정적인 면, 즉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개라는 것은 지금 당장은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지만, 잠시 후 해가 뜨고 빛이 나면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임을 성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어떤 의미에서 인생을 안개라고 비유한 걸까?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여기서도 역시 안개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우리의 생명도 안개와 같아서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바로 겸손과 희망이다.

 

1. 겸손

먼저 우리는 안개처럼 사라질 우리의 생명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오늘날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 돈 있으면 사람이 교만해 진다. 지위. 지위가 높으면 목에 힘이 들어간다. 지식. 아는 것이 많으면 모르는 사람들을 쉽게 무시한다. 외모. 얼굴이 예쁘고 잘생기면 스스로 교만해지기 쉽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생명이 사라짐과 동시에 끝나고 마는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생명 앞에서 우리는 겸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2. 희망

둘째로 유한한 인생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희망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젠간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새롭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개 같이 유한한 생명 앞에서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기별이 우리를 회의주의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삶이 안개와 같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땅에서 작은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았던 것처럼, 이 땅에서의 삶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경험하는 작은 천국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적용

이 사실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사모하게 할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늘을 경험하도록 촉구한다. 비록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지만, 그 생명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침내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며 살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이미 내 삶에 임하였음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오늘을 통해 내일을 얻는 자들의 삶이다.

 

 

목요일 : 선한 일을 알고 행함

 

야고보는 415-17절에서 사람의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임을 깨달은 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설명하고 있다.

 

(4:15-17)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인생의 불확실함을 깨달은 자가 늘 생각해야 할 모토는 바로 주의 뜻이면이다. 주의 뜻이면 나아가고, 주의 뜻이 아니면 멈춰 서겠다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13절에서 말하는 자의 삶과 대조된다. 13절에 묘사된 사람은 모든 계획의 중심에는 자신이 서 있다. 그러나 15절에 묘사된 사람은 계획을 세우기 전에, 혹은 그 이후에라도 항상 주의 뜻을 찾는다. “주의 뜻이면자신의 계획까지도 기꺼이 바꾸고자 하는 자가 바로 15절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예레미야 2:13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두 가지 악이 나오는데, 첫째는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했다는 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데, 그 생수의 근원을 그들은 거절한 것이다. 둘째는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스스로 물을 얻기 위해 웅덩이를 판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계획을 통해 갈증을 풀려는 노력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곧 깨닫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판 웅덩이는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약 4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과 동일하다. ‘주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만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분명한 임을 약 4:15은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약 416절은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도 악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랑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느냐에 따라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녀가 공부를 잘 하는 것을 자랑한다면, 그에게는 자녀의 성적이 중요한 것이다. 또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외모를 자랑하는 자는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자기가 가진 자동차나 집을 자랑하는 자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처럼 그가 무엇을 자랑하느냐는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약 4:16과 같이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자는 결국 허탄한 것, 즉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요, 야고보는 이러한 삶을 이라고 정의한다.

 

반면에 바울은 갈 6:14에서 자신의 자랑을 이렇게 말했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십자가 외에는 중요한 게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바로 십자가였다. 이렇게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그 십자가의 길을 추구하며 살게 되는데, 바울은 이것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자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된다는 뜻이다. 바울은 빌 3장에서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유대의 전통에 따라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세인이었다. 또한 열심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가 예수를 모를 때에는 이런 모든 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 난 후부터 그는 이 모든 것을 자랑거리가 아닌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것이 허탄한 것을 자랑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요, 유일하고도 영원한 십자가의 가치를 아는 자의 삶이다.

 

적용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며 살고 있는가? 내 입을 통해, 내 삶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기 원하는가? 여러분 손에 들려진 값비싼 빽이 자랑이 되지는 않는가? 고급스러운 자동차가 여러분의 자랑이지는 않는가?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우리 자식의 직장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무엇을 자랑하느냐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해 온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십자가의 가치를 참으로 이해한 자의 삶이다.

 

또한 야고보는 17절에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고 말했다. 이것은 악을 행하는 것도 죄지만, 선을 행치 않는 것도 죄가 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것도 죄지만, 영원한 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적용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내가 가진 빛을 품고만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이 말은 빛을 다른 자들에게 비추라는 뜻이다.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빛을 가진 자들이 그 빛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것도 죄가 된다. 4:17에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허탄한 것을 우리의 자랑거리로 삼는 대신, 우리가 가진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도 새로운 빛을 전해 줄 것이다. 이 일이 저와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되길 기도한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왜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며,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것이 왜 허탄한 일인지를 살펴보았다. 이 두 권면은 모두 우리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요구한다. 법을 주신 자도 그리스도시오, 그 법대로 판결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판단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자랑하므로 우리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길 바란다. 이것이 유한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확실한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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