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에도 신앙 초보자의 지성의 상식이 있겠고

또 하나는 성경을 아는 만치의 성경을 위주로 한 기존 상식을 동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상의 해답이 꼭 원만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적이라는 말에는 상당히 성경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공부를 비롯하여 난제풀이의 어떤 전문성 말입니다.

 

그러자니 그런 것이면 자연 신학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어집니다.

신학은 신학대학에서 80학점(일반과목 말고) 정도를 공부해야 하고

대학원의 전문분야에서 또 그 학점 만큼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전문분야란 대학원에서 신학신학, 구약신학, 목회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별로 나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제가 될 때는 그 분야의 전공이 일차적이지만

이상의 전공이 다 아울려서 원만한 해답을 찾아야 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 말은 실상 옳은 것 같지만 어두운 그늘이 있는 것을 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지 못하여 상식선이거나 그 전공을 무시한 편파적일 때

그 난제의 해답에 대한 원만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곧 신학에 있어서 성경적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이상의 모든 내용을 포괄하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예언의 신이 그 해답이라고 할찌라도 그것이 만능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편에 따른 것들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데 많은 성경절을 제시하면서

복잡한 공부를 하게 되면 해답은 고사하고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예신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이 없는데 수다하게 예신으로만

대답을 하면 혼란해지고 오히려 예신을 불신하는 경우에 이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성경적이란 이해(이해되는 만치)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 이해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견이 다르면 나와의 반대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한사코

흑백의 논리로 대결하려는 경우도 유발하게 되는 잘못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추구하는 의미에서 성경적인 방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나눔이 대개 성경, 혹은 예신이라고 해놓고 빈틈이 없는 일변도로만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정론도 여지를 두어야 합니다. 사실상 난제일수록 단정이 아니라 이럴지도 모른다는 견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정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획일적인 단안의 답변이 성경적인 면의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이상의 내용들은 일단 수용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보다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카스다 에서 정영근 목사)